여행 가는데 ‘샤워기’는 왜 챙겨요?
베트남 나트랑의 한 4성급 호텔에서 촬영했다는 샤워기 필터 변화 양상. [유튜브]/ 정상혁 기자 ©조선일보
“굉장히 중요한 여행 필수품이죠. 그냥 좀 조심하려고 쓰는 건데, 특히 여러 도시를 돌아다닐 때요. 제 피부가 어떤 자극도 받지 않게 신경 쓰고 있어요. 어떤 호텔에서는 사이즈가 안 맞기도 하는데, 95% 확률로 맞아요.” 최근 가수 제니(29)가 한 패션 관련 유튜브에 출연해 실제 자신의 애용품을 들어 보였다. 샤워기 필터 헤드. “요즘 사용하는 건 이건데요, 한국 제품일 거예요.” 매번 들고 다니면서 호텔 욕실에 달아 쓴다는 것이다.
톱스타의 유난일까? 꼭 그런 건 아니다. 이미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여행지의 수질 상태를 알려주고 ‘샤워기 필터’ 정보를 서로 나누는 한국인들로 넘쳐난다. 이를테면 인기 관광지인 유럽 등지에는 노후 배관이 많고, 물에 석회가 많아 피부 염증이나 모발 손상 및 배탈을 유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게 그 이유. “이탈리아에서 필터 까매지는 거 본 뒤로는 매번 챙겨요.” “동유럽 한 달살이 하다가 머리카락 진짜 개털 된 적 있어요.” “포르투갈 포르투, 너무 충격. 물 틀자마자 필터 바로 브라운색 됐음.”
상비약과 더불어 한국인의 여행 필수품이 된 샤워기 필터. 특히 가성비를 따라 동남아로 향하는 관광객에게 각광받고 있다. 이곳 수돗물도 석회질 함량이 높기 때문이다. 일부는 석회 제거 샴푸를 챙겨 갈 정도. 그러자 샤워기 필터 업체뿐 아니라 항공사까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 2월 나트랑·다낭·보홀 등 동남아 노선 예약 승객에게 샤워기 필터 1000개를 선착순 제공하는 행사를 벌인 에어서울 관계자는 “동남아 여행객 중심으로 위생 문제에 관심이 높아진 추세를 반영했다”고 밝혔다.
다만 호텔은 난감해졌다. 필터 교체 시 힘 조절(?)을 못 해 샤워기를 파손하거나, 퇴실하면서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투숙객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바글바글해 ‘경기도 다낭시’라고 하는 베트남 다낭의 한 유명 호텔은 “허가 없이 호텔 설비(샤워기 캡)를 제거하거나 교체할 경우 벌금 250달러가 부과됩니다”라고 한글로 안내문을 배포하기 시작했다. 호텔 관계자는 “잘못된 방식으로 필터를 교체하는 사람들 탓에 불필요한 수리비가 발생하고 있다”며 “꼭 필터를 끼우고 싶을 경우 안내 데스크에 연락하면 직원을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금지 구역’은 늘고 있다. 지난겨울 다낭의 5성급 호텔을 예약했다는 여성은 “피부가 예민해 동남아 지역에 갈 때는 샤워기 필터를 꼭 챙겨 다니는데 이번엔 호텔 규정에 따라 필터 교체가 안 된다는 답변을 받았다”며 “결국 여행사를 통해 호텔을 변경했다”고 했다. 너무 호들갑 떠는 것 아니냐는 눈총도 있다. “그럼 그 물로 요리하는 음식은 어떻게 먹을 거냐”는 것이다. 물론 이를 염려해 수도꼭지용 필터, 전기 포트를 따로 챙겨 다니는 한국인도 적지 않다.
수질은 거짓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튜브만 봐도 해외 호텔의 샤워기 필터 갈변 속도를 보여주는 증거가 한가득이다. 한 수도 배관 전문가가 베트남 나트랑의 4성급 호텔에서 촬영했다는 영상, 온수를 틀자 30초도 안 돼 샤워기 필터가 커피 색깔로 변했다. 꺼낸 필터를 휴지로 닦았더니 검은 찌꺼기가 묻어 나왔다. 괜한 엄살이 아닌 것이다. 물 좋은 한국, 그러나 안전 지대는 아니다. 지난 4월 경기 여주시에서는 ‘수돗물 위생 관리 실태 점검’ 결과 4급수 지표 생물 깔따구 유충이 발견됐다. 여주시는 4월분 수도 요금을 50% 감면하기로 했다.
걱정이 깊어질수록 시장은 커지고 있다. 2중·3중, 심지어 8중 샤워기 필터가 나왔고, 불순물 강력 제거를 홍보하는 ‘신생아용’ 샤워기 필터도 여럿. 일반 수돗물을 유황이 함유된 천연 온천수처럼 바꿔주는 샤워기도 최근 출시돼 3일 만에 준비 물량 1300개가 완판됐다. ‘물갈이’가 거세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