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시민권자 투표권'에 두쪽난 미국…“불법 선거 막자” “트럼프 음모론”

'비시민권자 투표권'에 두쪽난 미국…“불법 선거 막자” “트럼프 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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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미국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에 설치된 기표소에서 미 대선 프라이머리(예비선거) 유권자가 투표를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비시민권자 투표를 두고 미국 보수와 진보 진영 간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 공화당은 비시민권자에게 지방선거 투표권을 주는 건 시민권이 곧 투표권이라 규정한 연방헌법을 어기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면서 해당 문제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주장하는 ‘대선 불법투표’ 의혹과 연결지으려 한다. 반면 민주당은 ‘세금이 곧 투표권’이라며 지방선거에서라도 비시민권자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고 반박한다.


뉴욕타임스(NYT)·워싱턴포스트(WP) 등에 따르면 미 하원은 공화당 주도로 지난달 23일 비시민권자도 지방선거에서 투표할 수 있도록 허용한 워싱턴DC의 시 조례를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워싱턴DC 시의회는 지난 2022년 10월 지역 선거에서 불법 이민자, 영주권자 등 비시민권자에게 시장·시의원·시 검사장 투표권을 주는 조례를 통과시켰는데, 이번에 하원을 통과한 법은 이를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브라이언 스테일(공화·위스콘신) 하원 행정위원장은 “미국 선거는 미국 시민을 위한 것”이라며 “비시민권자 투표와 외국 영향력을 방지하는 것은 선거 신뢰 회복에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반면 엘리노어 홈즈 노튼 하원의원(민주당·워싱턴DC)은 “연방 의회가 DC 지역 문제에 간섭할 명분이 없다”고 말했다. WP는 “이 법은 민주당이 우위인 상원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전했다.


비시민권자 지방선거 투표 두고 공화·민주 법정 싸움


뉴욕에서도 비시민권자 투표권을 두고 공화당과 민주당이 법정 싸움 중이다. 뉴욕시 시의회는 지난 2021년 12월 불법체류자를 제외한 비시민권자에게 시장·시의원·시 감사관·공공변호인·5개 자치구 구역장에 대한 투표권을 부여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이에 반발한 공화당 측 의원들이 효력 정지 소송을 냈고, 뉴욕주 법원은 지난해 6월 “시민권자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하는 연방 헌법과 일치하지 않는다”며 해당 조례에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런 결정은 지난 2월 2심인 뉴욕주 항소법원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한 달 뒤 민주당 측이 항소하면서 최종 판단은 주 대법원이 내리게 됐다.


비시민권자 투표권 논란은 대통령이나 주지사, 연방·주 의원 같은 ‘전국구’ 선출직과는 상관이 없다. 이들에 대해선 비시민권자의 투표가 법으로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 의회는 1996년 비시민권자의 연방 및 주 단위 투표를 금지하고 이를 어길 때 벌금, 징역, 추방 등의 징계를 내릴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워싱턴DC와 뉴욕시의 경우처럼 시 단위 이하 지방정부에선 상황이 다르다. 법률상 투표권자 범위가 명시되지 않아 지방정부가 자율적으로 정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DC와 뉴욕시 외에 민주당이 강세인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 메릴랜드주의 11개 도시와 버몬트주 2개 도시 등이 비시민권자에게 지방선거 투표권을 부여하고 있다.


반면 공화당이 강세인 지역은 아예 주 헌법에 시민권자만 지방선거에 투표할 수 있도록 하는 문구를 넣고 있다. 애리조나·노스다코타·앨라배마·콜로라도·플로리다·오하이오·루이지애나 등이 대표적이다.


“러·중 불법투표” 음모론 불지피는 트럼프


보수 진영은 연방헌법에 ‘시민권이 곧 투표권’이라고 명시돼 있음에도 민주당이 법의 허점을 이용해 지역 단위에서 비시민권자에게 투표권을 주고 있다고 비난한다. 공화당은 나아가 이를 트럼프 전 대통령이 주장해 온 ‘비시민권자 불법투표’ 의혹과 연결지으려는 심산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20년 대선 패배 이후 “대통령·연방 의원 선거 등에서 광범위한 유권자 사기가 이뤄져 왔다”며 “서류 미비 이민자들의 불법 투표에 선거가 취약해 민주당에 유리한 왜곡된 결과가 나왔다”는 주장을 펼쳐 왔다. 강성 트럼프 지지층인 마가(MAGA·Make American Great Again)를 중심으론 11월 대선 과정에서 러시아나 중국 등이 비시민권자들을 대거 미국에 보내 정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공화당에선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 주도로 이른바 ‘미국 유권자 자격 보호법’(Safeguard American Voter Eligibility Act·SAVE 법) 제정에 나서며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려 한다. 해당 법은 유권자 등록을 하려는 시민권자는 출생증명서나 여권과 같은 시민권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직접 확보해 주 정부에 제출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젊은층 투표 막힐라” 반대하는 민주당


반면 진보 진영은 비시민권자도 세금을 내기 때문에 지방선거에선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아가 공화당의 비시민권자 불법투표 문제 제기엔 정치적 의도가 다분하다고 비판한다. 비시민권자의 연방·주 단위 투표가 이미 금지돼 있으며, 적발된 불법 투표 비율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NYT는 “민주당 측은 이미 (주 정부가 파악한) 사회보장번호 등으로 신분이 증명된 시민권자들에게 출생증명서 등의 추가 증명을 요구하면 이를 구하기 어려운 젊은 층의 투표를 어렵게 만들 거라 우려한다”며 “상원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없는데도 지방선거 비시민권자 투표권 제한법과 SAVE 법 제정을 밀어붙이는 것 역시 대선 기간 내내 유권자에게 ‘불법 이민’ 이슈를 부각하려는 의도라고 본다”고 전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미국에선 1926년까지 비시민권자들은 연방정부 선거에까지 참여했지만, 점차 선거권을 제약받아왔다”며 “비시민권자 투표 논란은 최근 미국 내에서 강해진 반이민 정서가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승호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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